치료의 과정
작성자: renwed
작성일: 2015-04-11 18:34
조회: 380
치료의 과정
서두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낡고, 지저분하고, 부서진 오래된 대저택을 수리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집 주인이 모든 방, 심지어 하나님께 보이고 싶지 않은 방이라 할지라도, 청소하고 수리하고 다시 장식하도록 허락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므로 우리는 모든 상처들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며 이는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우리 중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그의 날에 이루실 것입니다(빌립보서 1:6).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시는 작업들이 우리 삶을 바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앞으로 다가올 것을 맛보는 것일 뿐입니다. 성학대에의해 만들어진 시련을 통해 우리 구세주를 신뢰하는 것을 배우는 일은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시며 따라서 우리는 이 회복의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대면하고, 슬픔을 감싸며, 승복을 선택하고, 사랑을 추구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회복의 일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진실과 대면할 때 찾아오는 희망
상처받은 자식을 인도하실 때 하나님은 그들을 부정의 함정으로부터 나오도록 이끄십니다.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1~32).
제자라는 것은 배우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지 구원의 순간에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유로 이르는 길에 대해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무력감, 배신감, 혼란감, 거절감의 굴레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진리의 과정을 설명하십니다.
성학대 피해자들은 진실을 대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학대와 그 아픔에 대한 기억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살아갑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학대의 아픔을 이겨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많은 피해자들이 학대 받는 동안 집중할 수 있는 틈을 벽 속에서 찾거나 그들의 몸을 버리고 더 즐거운 곳으로 솟구쳐 올라가기 위한 방법을 배웁니다. 자신을 숨기기 위한 다중인격을 개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분열 형태은 종종 현재까지 유지됩니다. "그 사람 잘못이 아니었어요. 분명히 제가 뭘 잘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저한테 그런 일을 했을겁니다." "제가 엄마한테 알려드리기만 했더라도 엄마는 저를 보호해줬을 겁니다." 많은 이들이 이런 식으로 가해자나 비가학적 부모에 대한 변명을 합니다.
과거의 학대에 대한 진실에 직면하는 것은 "그래요, 나는 학대 받았어요, 그리고 나를 학대했던 사람이 내가 결코 돌려 받을 수 없는 것을 앗아갔어요" 라고 말했을 때 시작됩니다.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억눌러져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지속되는 충격과 상당한 기간의 "기억 차단"의 증거가 있다면, 그 사람은 "구체적으로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나의 감정적인 문제가 적어도 성학대 받은 결과의 일부라는 것을 믿을 만한 이유가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에 직면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상해야 하는 모든 기억들을 하나님의 때에 다시 기억하도록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기억나는 내용을 일지에 기록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새로운 기억의 조각들이 생각났을 때, 그것을 우리 집에 초대한 친구나 손님을 환영하는 것처럼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이나 압도의 정도와는 상관 없이 과거는 적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회복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기억을 사용하여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십니다.
진실에 직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잃은 것을 축소시키는 것은 용기 있고 관대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부정의 어두움 속에 사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를 도울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가해자가 깊은 상처를 주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살아간다고 해서 가해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최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놔두느니 그들이 저지른 학대의 상처들에 직면할 기회를 주는 것이 훨씬 더 자비롭고 애정 어린 일인 것입니다.
성학대의 파괴적인 영향들을 그대로 인정하십시오. 이 글을 읽음으로써 회복의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겪었던 일들을 훈련된 목사 또는 상담자와 나누십시오. 그들은 당신 안에 있는 학대의 영향을 보다 정확히 볼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학대가 마음에 끼친 것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찾고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책을 읽고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상담을 받아 보십시오. 자신의 짐을 신뢰할 만한 친구 또는 배우자와 나누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들이 과거의 상처에 대해서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만큼 큰힘이 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성학대의 진실에 직면하는 세 번째 요소는 피해자들이 그들 자신을 더 이상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온 방법들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을 요구합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고통을 다루기 위해 무력감, 배신감, 혼돈감의 공포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을 발견합니다.
피해자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려 합니다. 한 성학대 피해 여성은 그들의 자녀들에게서 절대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보호 능력이 자녀들이 상처받는 것으로부터 지켜내기에 충분하기를 바랬습니다. 또 다른 한 성학대 피해 남성은 가족들의 동의하지 않을만한 일은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표는 대립 또는 실패 없이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자기 방어의 태도는 충분히 납득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예비하심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존하기를 결정했다는 증거입니다. 이 두가지 예 모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편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갈망의 모습입니다.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신뢰를 저버린 누군가에 의해 다시는 심한 상처를 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자기 지향적인 모든 노력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스스로에 의한 보호의 결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존하는 대신에 우리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려는 것은 어둠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작은 불씨로 태워서 밝히고 결국에는 고통으로 끝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이사야 50:10~11).
우리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두려울 때 행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은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처받고, 두렵고, 수치스럽고, 배고플 때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은 이전에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증명된 안전의 형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불평하고, 위협을 사용하고, 우리에게 겁을 주는 자들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스스로 불을 피우는 것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는 헛된 자기 보호에 불과합니다. 잠언의 말씀에서 이 진리를 잘 설명해 줍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4:12)."
지금 당장은 자기 보호만큼 당연한게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이는 고통과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성학대 피해자들은 그들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있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진실과 직면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열심히 놀고, 혹은 주님으로부터 달아나는 일을 통해 그들의 두려움과 분노를 그들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학대 피해자가 분노, 무지 및 자기 보호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기꺼이 자신에게 일어난 학대를 솔직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더 이상의 해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능력이 없다고 시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현재 자신의 모습이 그동안 갈망해왔던 이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음을 시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진실의 욕망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은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며 이는 부정이 궁극적으로 가져다 줄 고통보다 훨씬 덜할 것입니다.
슬픔을 수용할 때 찾아오는 위로
오랫동안 학대 받은 개가 모든 인간을 두려워 하듯이, 성학대 피해자들은 종종 위로로부터 도망칩니다. 더 이상 학대를 받기 싫어하는 개는 이를 보이며 분노를 드러내거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사람으로부터 도망칩니다. 이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친다기 보다는 고통과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혼란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피해자들은 그들의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를 충분한 시간을 두고 지켜보며 고통에 직면하기 보다는 충동적으로 "도망, 혹은 물어뜯기"의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배반의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려는 그 행동으로 인해 그들은 위로로부터 달아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다루는 보다 좋은 방법을 설명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 임이요(마태복음 5:4)." 예수님은 단지 어떤 종류의 슬퍼함에 대해 이야기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3절)" 내용과 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시인하고 그 다음부터는 죄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뤄질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죄와 그 결과에 대해 애통하는 과정으로 통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고통에 직면하고 슬픔을 수용하는 동시에 위안을 기대하는 것은 어색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문제를 다루는 올바른 길입니다.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애통해 해야 하는 지를 배우는 것은 치유의 과정을 위해 필요합니다. 빼앗긴 것들에 대해 슬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순결을 느껴야만 합니다. 잃어 버린 동심과 신뢰를 애통해야 합니다. 또한, 더 이상의 해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지키려 했던 자기 방어의 죄악된 행동에 대해 슬퍼해야 합니다.
슬픔으로 인해 변화될 정도로 오랫동안 슬픔을 수용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며, 가해자 또는 하나님을 증오합니다.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동심과 순결의 상실을 슬퍼하기 보다는 그러한 자신만의 감정들을 차라리 죽여버립니다. 죄악되고, 자기 보호적인 관계 태도를 포기하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심지어 하나님과 전쟁을 하려합니다.
많은 성학대 피해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하나있는데, 과거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엎질러진 물 때문에 슬퍼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화나게 했던 상실의 슬픔을 감싸주는 것입니다.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이 슬퍼하시는 지를 피해자들은 종종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학대를 멈추게 하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무관심 또는 사랑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와 마지막 심판을 참으실 때, 그분은 실제로 해산의 고통 때처럼 아파하시며 심판과 정의를 실천하실 적절한 순간까지 고통 속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이사야 42:14).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가학범들을 서둘러서 심판하신다면, 그분의 진노는 우리 모두에게 떨어질 것입니다. 아무도 도망갈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일생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학대 피해자들은 더 이상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주변사람들을 무능력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겪었던 배신의 쓴 맛을 친구와 배우자가 경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성관계를 허락하지 않거나 문란한 성행위 또는 외도를 통해 자신의 모순되는 감정을 다루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다른 이와의 깊고 애정어린 관계로부터 그들의 마음을 숨기고 냉담하려 합니다. 다른 이들과 풍성히 관계 맺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피해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지으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거부하는 일종의 약탈행위를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기 위해 피해자는 자신들이 견뎌야 했던 죄에 대한 슬픔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다른이들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슬픔을 수용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시인한 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및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그러한 상처를 향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많은 피해자들이 용서를 구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학대 피해자는 자신들이 겪은 일에 대해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행위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학대 받는 동안, 또는 그 후에 느꼈을 지 모르는 상처와 감정들에 대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느껴서도 안됩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의 슬픔과 다른 이들에게 행한 것들을 직면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내려 놓을 때 찾아오는 평안
올바른 유형의 슬픔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 오도록 허락하는 일은 큰 위험을 안겨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험은 충동적으로 물거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을 피하는 학대 받은 개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에 안전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신 바로 다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마태복음 5: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저항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는 자들은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위해 자신을 내려 놓는 사람들은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과 깨어진 관계의 혼잡함 속에서 "빛을 보고" 그의 마음을 아버지 집으로 돌린 탕자의 온유한 영혼과 같습니다(누가복음 15:11~32). 탕자는 아버지 집에서 종이 되고자 하는 것 외에 더 바랄 것이 없다며 돌아온 반항아였습니다. 바로 이 순종의 태도로 인해 사랑하는 아버지는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성학대 피해자들이 수 년 전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지라도, 그들의 정황과 감정적 혼란의 상처 속에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주님께 맡겨야만 합니다.
만일 자신을 내려 놓는 일이 힘이 든다면, 당신의 신뢰를 요구하시는 그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그분 또한 희생자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을 향한 상상할 수도 없는 범죄의 고통을 이겨야만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다른 이들의 수치심을 지고 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셨습니다. 그분은 어둠 속에서 외롭고, 헐벗고, 피 흘리는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가복음 15:34)라고 애처롭게 울부짖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아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 값을 감당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주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수치를 지고 가는 것의 아픔을 주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늘의 모든 천사가 침묵하는 중에 흑암 가운데 혼자서 겪는 고통을 주님보자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죄의 피해자이신 그분은 3일 후에 부활하셨고 주님은 이제 그분을 의지하는 모든 이들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 끔찍한 학대와 어둠으로부터 무한한 선(善)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와의 영원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아버지가 예수님을 위로하신 것과 같이 아버지 또한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라고 고백하며 자기 방어의 투쟁을 포기하고 구세주와 연합하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긍국적인 구원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일상의 보살핌과 보호, 그리고 변화를 위해 자신을 내려 놓고 순종하는 피해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화평의 길 위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희생의 어두움이 자유와 희망의 첫 새벽 빛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종류의 슬픔과 내려 놓음을 통한 성경적인 변화는 이미 많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매우 위험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위험하게 보인다는 것은 실제로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과정은 피해자로 하여금 삶에 대한 열정을 되찾게 해 줍니다. 소비적인 투쟁의 끝을 맺음으로써 이들은 활력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능력과 개인적 안전을 누리기 시작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생깁니다.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마음이 상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잘못된 것들이 바로 서도록 하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7:9~13). 하나님께 위로를 받을 때까지 슬퍼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받은 위로가 다른 이들을 향해 베푸는 위로로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슬픔과 내려 놓음을 통해, 하나님은 마음속에 평화를 가져다 주고 무력감, 배반감, 혼란감, 거절감 속에 잃어버렸던 정체성, 목적, 그리고 열정을 회복시키는 변화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랑을 추구할 때 찾아오는 기쁨
피해자들이 정직, 회개, 내려 놓음, 그리고 하나님과의 신뢰 회복의 과정을 통해 변화될 때,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들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게 됩니다.
온유한 자(하나님 앞에 순복하는 자들)를 축복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6)"라고 하셨습니다.
의로움을 갈망한다는 것은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선망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원한과 고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한 것 같이 다른 이를 사랑하고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기쁨, 만족으로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으려 하는 것 만큼 큰 만족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이는 하루 하루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도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들과의 삶 속에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기회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진리의 원리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다른 이들과 관계 맺는 것에 대한 위험을 감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영적인 필요와 학대에 대한 우리 자신의 자기 보호적 태도를 인정할 때에 진정한 자유와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고통 받으신 그분께 온유함으로 굴복할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의 관계에 필요한 위험을 감수 할 때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에 대한 주림"은 우리의 적들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에 대한 갈망에 대해 말씀하신 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 임이요(마태복음 5:7)"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를 이해 할 때에 우리는 이 새로운 사랑에 대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행해졌던 어떤 죄악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행해진 끔직한 죄악의 심각성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자신이 용서받은 만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용서를 조금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조금만 사랑하는 자들입니다(누가복음 7:47). 예수님은 또한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자가 그가 졌던 빚보다 훨씬 적은 빚을 진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이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를 경고하셨습니다(마태복음 18:21~35).
과거에 잃은 것과 현재 자기 보호에 대한 슬픔을 수용하는 것은 용서받음의 깊은 경외와 경의로 이어집니다. 만일 내가 용서 받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맛 보았다면 나는 다른 이들도 이 기쁨을 누리기 바랄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이 단순히 고통과 분노, 또는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는 것 쯤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변화 과정에 꼭 필요한 부분이지만 많은 이들이 용서한다는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용서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반드시 사라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정의에 대한 갈망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깊은 분노와 상처를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거의 모든 경우, 학대 받은 자들이 부정의 어두움에서 나와서 그들에게 가해진 잘못된 것들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할 때까지는 진정한 의미의 용서는 심지어 고려되지도 않습니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훨씬 큰 호의 때문에 다른이들이 당신에게 진 빚을 탕감하고자 하는 자진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학대자, 비가학적 부모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많은 이들이 당신에게 영원토록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진 빚이 사실이고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불하신 값, 즉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 독생자의 생명은, 우리에게 막대한 빚을 졌지만 하나님께 비하자면 적은 빚을 진 자들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사랑의 자유를 우리와 나누기 원하십니다.
기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학대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능력 주십니다. 궁극적인 선은 가해자들 스스로가 성학대의 죄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용서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를 해한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선을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로마서 12:17~21). 케익을 굽거나 생일 카드를 보내는 것이 한가지 방법입니다. 학대자와의 대면이 요구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8:15~17; 로마서 13:1~3). 대면을 통해 선을 행하는 것은 외과 의사가 환자에게 수술하는 행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수술 칼로 그를 자르는 것입니다. 가해자에게 일시적인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그의 삶을 혼란에 빠뜨리고 두려움과 분노를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학대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유쾌하고 좋은 척 하는 것이 절대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선은 담대하고 애정 어린 삶의 선물이며 상대방이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고린도후서 2:15~16). 성학대자에 대해 선을 행하는 선물은, 하나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가 학대한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하기 위해 보복과 정의에 대한 정당한 욕구를 연기시키는 것입니다. 용서는 증오와 쓰라림을 그대로 놓아 둠으로써 복음의 열정과 사랑에 대한 담대함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한 희망
만일 당신이 성학대의 상처와 싸우고 있다면, 이 시점에서 당신을 위한 희망이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진실에 직면하고, 슬픔을 수용하고, 자기 자신을 내려 놓고, 당신 가해자를 용서하는 수준까지 사랑을 추구하는 과정을 겪어 나갈 수 있을 지도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당신은 "제가 그런 모든 고통을 왜 감수해야 하나요? 전 지금 나름대로 행복하거든요."라고 질문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답은 명백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치유의 과정을 기꺼이 거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삶 그리고 당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 큰 기쁨으로 임하여 당신을 놀라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성학대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기본적인 몇 가지 교훈을 적용해 봤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 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 임이요(마태복음 5:7~9)." 우리는 마지막 구절에서 가장 큰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평화의 도구가 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 댄 B. 앨렌더
댄 앨렌더(Dan Allender)는 워싱턴 시애틀의 웨스턴 신학교에서 상담 교수로 재직중이며 Wounded Heart Ministries의 대표입니다.
회복을 위한 심리치료가 필요하시다면
전문적으로 성과 동성애 문제를 다루는 "성중독심리연구소" 에 문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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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웰스프링
서두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낡고, 지저분하고, 부서진 오래된 대저택을 수리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집 주인이 모든 방, 심지어 하나님께 보이고 싶지 않은 방이라 할지라도, 청소하고 수리하고 다시 장식하도록 허락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므로 우리는 모든 상처들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며 이는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우리 중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그의 날에 이루실 것입니다(빌립보서 1:6).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시는 작업들이 우리 삶을 바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앞으로 다가올 것을 맛보는 것일 뿐입니다. 성학대에의해 만들어진 시련을 통해 우리 구세주를 신뢰하는 것을 배우는 일은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시며 따라서 우리는 이 회복의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대면하고, 슬픔을 감싸며, 승복을 선택하고, 사랑을 추구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회복의 일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진실과 대면할 때 찾아오는 희망
상처받은 자식을 인도하실 때 하나님은 그들을 부정의 함정으로부터 나오도록 이끄십니다.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1~32).
제자라는 것은 배우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지 구원의 순간에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유로 이르는 길에 대해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무력감, 배신감, 혼란감, 거절감의 굴레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진리의 과정을 설명하십니다.
성학대 피해자들은 진실을 대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학대와 그 아픔에 대한 기억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살아갑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학대의 아픔을 이겨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많은 피해자들이 학대 받는 동안 집중할 수 있는 틈을 벽 속에서 찾거나 그들의 몸을 버리고 더 즐거운 곳으로 솟구쳐 올라가기 위한 방법을 배웁니다. 자신을 숨기기 위한 다중인격을 개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분열 형태은 종종 현재까지 유지됩니다. "그 사람 잘못이 아니었어요. 분명히 제가 뭘 잘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저한테 그런 일을 했을겁니다." "제가 엄마한테 알려드리기만 했더라도 엄마는 저를 보호해줬을 겁니다." 많은 이들이 이런 식으로 가해자나 비가학적 부모에 대한 변명을 합니다.
과거의 학대에 대한 진실에 직면하는 것은 "그래요, 나는 학대 받았어요, 그리고 나를 학대했던 사람이 내가 결코 돌려 받을 수 없는 것을 앗아갔어요" 라고 말했을 때 시작됩니다.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억눌러져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지속되는 충격과 상당한 기간의 "기억 차단"의 증거가 있다면, 그 사람은 "구체적으로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나의 감정적인 문제가 적어도 성학대 받은 결과의 일부라는 것을 믿을 만한 이유가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에 직면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상해야 하는 모든 기억들을 하나님의 때에 다시 기억하도록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기억나는 내용을 일지에 기록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새로운 기억의 조각들이 생각났을 때, 그것을 우리 집에 초대한 친구나 손님을 환영하는 것처럼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이나 압도의 정도와는 상관 없이 과거는 적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회복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기억을 사용하여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십니다.
진실에 직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잃은 것을 축소시키는 것은 용기 있고 관대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부정의 어두움 속에 사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를 도울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가해자가 깊은 상처를 주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살아간다고 해서 가해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최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놔두느니 그들이 저지른 학대의 상처들에 직면할 기회를 주는 것이 훨씬 더 자비롭고 애정 어린 일인 것입니다.
성학대의 파괴적인 영향들을 그대로 인정하십시오. 이 글을 읽음으로써 회복의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겪었던 일들을 훈련된 목사 또는 상담자와 나누십시오. 그들은 당신 안에 있는 학대의 영향을 보다 정확히 볼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학대가 마음에 끼친 것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찾고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책을 읽고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상담을 받아 보십시오. 자신의 짐을 신뢰할 만한 친구 또는 배우자와 나누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들이 과거의 상처에 대해서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만큼 큰힘이 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성학대의 진실에 직면하는 세 번째 요소는 피해자들이 그들 자신을 더 이상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온 방법들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을 요구합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고통을 다루기 위해 무력감, 배신감, 혼돈감의 공포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을 발견합니다.
피해자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려 합니다. 한 성학대 피해 여성은 그들의 자녀들에게서 절대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보호 능력이 자녀들이 상처받는 것으로부터 지켜내기에 충분하기를 바랬습니다. 또 다른 한 성학대 피해 남성은 가족들의 동의하지 않을만한 일은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표는 대립 또는 실패 없이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자기 방어의 태도는 충분히 납득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예비하심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존하기를 결정했다는 증거입니다. 이 두가지 예 모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편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갈망의 모습입니다.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신뢰를 저버린 누군가에 의해 다시는 심한 상처를 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자기 지향적인 모든 노력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스스로에 의한 보호의 결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존하는 대신에 우리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려는 것은 어둠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작은 불씨로 태워서 밝히고 결국에는 고통으로 끝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이사야 50:10~11).
우리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두려울 때 행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은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처받고, 두렵고, 수치스럽고, 배고플 때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은 이전에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증명된 안전의 형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불평하고, 위협을 사용하고, 우리에게 겁을 주는 자들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스스로 불을 피우는 것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는 헛된 자기 보호에 불과합니다. 잠언의 말씀에서 이 진리를 잘 설명해 줍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4:12)."
지금 당장은 자기 보호만큼 당연한게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이는 고통과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성학대 피해자들은 그들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있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진실과 직면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열심히 놀고, 혹은 주님으로부터 달아나는 일을 통해 그들의 두려움과 분노를 그들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학대 피해자가 분노, 무지 및 자기 보호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기꺼이 자신에게 일어난 학대를 솔직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더 이상의 해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능력이 없다고 시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현재 자신의 모습이 그동안 갈망해왔던 이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음을 시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진실의 욕망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은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며 이는 부정이 궁극적으로 가져다 줄 고통보다 훨씬 덜할 것입니다.
슬픔을 수용할 때 찾아오는 위로
오랫동안 학대 받은 개가 모든 인간을 두려워 하듯이, 성학대 피해자들은 종종 위로로부터 도망칩니다. 더 이상 학대를 받기 싫어하는 개는 이를 보이며 분노를 드러내거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사람으로부터 도망칩니다. 이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친다기 보다는 고통과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혼란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피해자들은 그들의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를 충분한 시간을 두고 지켜보며 고통에 직면하기 보다는 충동적으로 "도망, 혹은 물어뜯기"의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배반의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려는 그 행동으로 인해 그들은 위로로부터 달아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다루는 보다 좋은 방법을 설명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 임이요(마태복음 5:4)." 예수님은 단지 어떤 종류의 슬퍼함에 대해 이야기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3절)" 내용과 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시인하고 그 다음부터는 죄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뤄질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죄와 그 결과에 대해 애통하는 과정으로 통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고통에 직면하고 슬픔을 수용하는 동시에 위안을 기대하는 것은 어색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문제를 다루는 올바른 길입니다.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애통해 해야 하는 지를 배우는 것은 치유의 과정을 위해 필요합니다. 빼앗긴 것들에 대해 슬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순결을 느껴야만 합니다. 잃어 버린 동심과 신뢰를 애통해야 합니다. 또한, 더 이상의 해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지키려 했던 자기 방어의 죄악된 행동에 대해 슬퍼해야 합니다.
슬픔으로 인해 변화될 정도로 오랫동안 슬픔을 수용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분노하며, 가해자 또는 하나님을 증오합니다.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동심과 순결의 상실을 슬퍼하기 보다는 그러한 자신만의 감정들을 차라리 죽여버립니다. 죄악되고, 자기 보호적인 관계 태도를 포기하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심지어 하나님과 전쟁을 하려합니다.
많은 성학대 피해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하나있는데, 과거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엎질러진 물 때문에 슬퍼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화나게 했던 상실의 슬픔을 감싸주는 것입니다.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이 슬퍼하시는 지를 피해자들은 종종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학대를 멈추게 하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무관심 또는 사랑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와 마지막 심판을 참으실 때, 그분은 실제로 해산의 고통 때처럼 아파하시며 심판과 정의를 실천하실 적절한 순간까지 고통 속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이사야 42:14).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가학범들을 서둘러서 심판하신다면, 그분의 진노는 우리 모두에게 떨어질 것입니다. 아무도 도망갈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일생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학대 피해자들은 더 이상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주변사람들을 무능력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겪었던 배신의 쓴 맛을 친구와 배우자가 경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성관계를 허락하지 않거나 문란한 성행위 또는 외도를 통해 자신의 모순되는 감정을 다루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다른 이와의 깊고 애정어린 관계로부터 그들의 마음을 숨기고 냉담하려 합니다. 다른 이들과 풍성히 관계 맺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피해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지으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거부하는 일종의 약탈행위를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기 위해 피해자는 자신들이 견뎌야 했던 죄에 대한 슬픔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다른이들에게 저지른 죄에 대한 슬픔을 수용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시인한 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및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그러한 상처를 향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많은 피해자들이 용서를 구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학대 피해자는 자신들이 겪은 일에 대해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행위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학대 받는 동안, 또는 그 후에 느꼈을 지 모르는 상처와 감정들에 대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느껴서도 안됩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의 슬픔과 다른 이들에게 행한 것들을 직면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내려 놓을 때 찾아오는 평안
올바른 유형의 슬픔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 오도록 허락하는 일은 큰 위험을 안겨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험은 충동적으로 물거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을 피하는 학대 받은 개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에 안전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신 바로 다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마태복음 5: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저항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는 자들은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위해 자신을 내려 놓는 사람들은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과 깨어진 관계의 혼잡함 속에서 "빛을 보고" 그의 마음을 아버지 집으로 돌린 탕자의 온유한 영혼과 같습니다(누가복음 15:11~32). 탕자는 아버지 집에서 종이 되고자 하는 것 외에 더 바랄 것이 없다며 돌아온 반항아였습니다. 바로 이 순종의 태도로 인해 사랑하는 아버지는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성학대 피해자들이 수 년 전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지라도, 그들의 정황과 감정적 혼란의 상처 속에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주님께 맡겨야만 합니다.
만일 자신을 내려 놓는 일이 힘이 든다면, 당신의 신뢰를 요구하시는 그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그분 또한 희생자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을 향한 상상할 수도 없는 범죄의 고통을 이겨야만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다른 이들의 수치심을 지고 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셨습니다. 그분은 어둠 속에서 외롭고, 헐벗고, 피 흘리는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가복음 15:34)라고 애처롭게 울부짖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아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 값을 감당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주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수치를 지고 가는 것의 아픔을 주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늘의 모든 천사가 침묵하는 중에 흑암 가운데 혼자서 겪는 고통을 주님보자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죄의 피해자이신 그분은 3일 후에 부활하셨고 주님은 이제 그분을 의지하는 모든 이들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 끔찍한 학대와 어둠으로부터 무한한 선(善)이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와의 영원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아버지가 예수님을 위로하신 것과 같이 아버지 또한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복음 22:42)라고 고백하며 자기 방어의 투쟁을 포기하고 구세주와 연합하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긍국적인 구원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일상의 보살핌과 보호, 그리고 변화를 위해 자신을 내려 놓고 순종하는 피해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화평의 길 위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희생의 어두움이 자유와 희망의 첫 새벽 빛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종류의 슬픔과 내려 놓음을 통한 성경적인 변화는 이미 많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매우 위험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위험하게 보인다는 것은 실제로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과정은 피해자로 하여금 삶에 대한 열정을 되찾게 해 줍니다. 소비적인 투쟁의 끝을 맺음으로써 이들은 활력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능력과 개인적 안전을 누리기 시작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생깁니다.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마음이 상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잘못된 것들이 바로 서도록 하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7:9~13). 하나님께 위로를 받을 때까지 슬퍼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받은 위로가 다른 이들을 향해 베푸는 위로로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슬픔과 내려 놓음을 통해, 하나님은 마음속에 평화를 가져다 주고 무력감, 배반감, 혼란감, 거절감 속에 잃어버렸던 정체성, 목적, 그리고 열정을 회복시키는 변화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랑을 추구할 때 찾아오는 기쁨
피해자들이 정직, 회개, 내려 놓음, 그리고 하나님과의 신뢰 회복의 과정을 통해 변화될 때,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들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게 됩니다.
온유한 자(하나님 앞에 순복하는 자들)를 축복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6)"라고 하셨습니다.
의로움을 갈망한다는 것은 하나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갈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선망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원한과 고독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한 것 같이 다른 이를 사랑하고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기쁨, 만족으로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으려 하는 것 만큼 큰 만족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이는 하루 하루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도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들과의 삶 속에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기회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진리의 원리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다른 이들과 관계 맺는 것에 대한 위험을 감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영적인 필요와 학대에 대한 우리 자신의 자기 보호적 태도를 인정할 때에 진정한 자유와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고통 받으신 그분께 온유함으로 굴복할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의 관계에 필요한 위험을 감수 할 때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에 대한 주림"은 우리의 적들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에 대한 갈망에 대해 말씀하신 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 임이요(마태복음 5:7)"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를 이해 할 때에 우리는 이 새로운 사랑에 대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행해졌던 어떤 죄악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행해진 끔직한 죄악의 심각성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자신이 용서받은 만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용서를 조금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조금만 사랑하는 자들입니다(누가복음 7:47). 예수님은 또한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자가 그가 졌던 빚보다 훨씬 적은 빚을 진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이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를 경고하셨습니다(마태복음 18:21~35).
과거에 잃은 것과 현재 자기 보호에 대한 슬픔을 수용하는 것은 용서받음의 깊은 경외와 경의로 이어집니다. 만일 내가 용서 받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맛 보았다면 나는 다른 이들도 이 기쁨을 누리기 바랄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이 단순히 고통과 분노, 또는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는 것 쯤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변화 과정에 꼭 필요한 부분이지만 많은 이들이 용서한다는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용서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반드시 사라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정의에 대한 갈망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깊은 분노와 상처를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거의 모든 경우, 학대 받은 자들이 부정의 어두움에서 나와서 그들에게 가해진 잘못된 것들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할 때까지는 진정한 의미의 용서는 심지어 고려되지도 않습니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훨씬 큰 호의 때문에 다른이들이 당신에게 진 빚을 탕감하고자 하는 자진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학대자, 비가학적 부모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많은 이들이 당신에게 영원토록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진 빚이 사실이고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불하신 값, 즉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 독생자의 생명은, 우리에게 막대한 빚을 졌지만 하나님께 비하자면 적은 빚을 진 자들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사랑의 자유를 우리와 나누기 원하십니다.
기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학대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능력 주십니다. 궁극적인 선은 가해자들 스스로가 성학대의 죄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용서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를 해한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선을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로마서 12:17~21). 케익을 굽거나 생일 카드를 보내는 것이 한가지 방법입니다. 학대자와의 대면이 요구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8:15~17; 로마서 13:1~3). 대면을 통해 선을 행하는 것은 외과 의사가 환자에게 수술하는 행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수술 칼로 그를 자르는 것입니다. 가해자에게 일시적인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그의 삶을 혼란에 빠뜨리고 두려움과 분노를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학대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유쾌하고 좋은 척 하는 것이 절대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선은 담대하고 애정 어린 삶의 선물이며 상대방이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고린도후서 2:15~16). 성학대자에 대해 선을 행하는 선물은, 하나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가 학대한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하기 위해 보복과 정의에 대한 정당한 욕구를 연기시키는 것입니다. 용서는 증오와 쓰라림을 그대로 놓아 둠으로써 복음의 열정과 사랑에 대한 담대함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한 희망
만일 당신이 성학대의 상처와 싸우고 있다면, 이 시점에서 당신을 위한 희망이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진실에 직면하고, 슬픔을 수용하고, 자기 자신을 내려 놓고, 당신 가해자를 용서하는 수준까지 사랑을 추구하는 과정을 겪어 나갈 수 있을 지도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당신은 "제가 그런 모든 고통을 왜 감수해야 하나요? 전 지금 나름대로 행복하거든요."라고 질문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답은 명백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치유의 과정을 기꺼이 거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삶 그리고 당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 큰 기쁨으로 임하여 당신을 놀라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성학대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기본적인 몇 가지 교훈을 적용해 봤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 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 임이요(마태복음 5:7~9)." 우리는 마지막 구절에서 가장 큰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평화의 도구가 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 댄 B. 앨렌더
댄 앨렌더(Dan Allender)는 워싱턴 시애틀의 웨스턴 신학교에서 상담 교수로 재직중이며 Wounded Heart Ministries의 대표입니다.
회복을 위한 심리치료가 필요하시다면
전문적으로 성과 동성애 문제를 다루는 "성중독심리연구소" 에 문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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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웰스프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