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학대의 상처

작성자: renwed 작성일: 2015-04-11 18:33 조회: 480
성학대의 상처

성학대의 피해자들은 과거의 사건이 오늘날에도 큰 상처 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아해 합니다. 과거의 상처는 시간에 의해 지워지지 않습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은 부러진 팔은 낫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식대로 회복 되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그 기억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을지언정 그 상처를 치유해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학대의 상처는 피해자가 크리스천이 되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마치 오래된 대저택을 수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택의 전 소유자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회손하였지만 새로운 주인은 저택의 이전의 영광을 회복시키고자 합니다. 모든 방을 다시 수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설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방이 즉각 아름답게 복원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특정 방에 대해 수리 작업을 하시지 못하게 하거나 하나님께 보이지 않도록 비밀의 방을 숨기는 것도 가능합니다.

완전한 회복에 대한 그런 방식의 저항은 성학대 피해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학대가 오늘날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거나 과거 상처에 대한 기억이 부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단순히 건물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이전하는 것보다는 방 하나 하나를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회복을 시작하기 앞서 상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성적으로 학대 받은 사람에게는 어떠한 상처가 있을까요? 성학대(발생 횟수, 가해자의 신원, 학대의 심각성과 본질과는 상관없이)는 피해자에게 무력감, 배신감, 혼돈을 일으키고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무력함의 느낌

일반적으로 성학대 피해자는 가해자보다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해자의 행위를 멈추게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육체적 또는 감성적인 해로부터 위협을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피해자는 상대방에 의해 사로잡힌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며 탈출구가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피해자는 또한 자신 안에 있는 아픔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학대 받는 동안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눈물을 참으려는 모든 에너지는 잠시 동안은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상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고통 자체가 가해자 못지않게 큰 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종종 학대의 사실, 또는 견뎌야만 했던 육체적, 감성적인 고통을 부인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게 됩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소용 없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자신의 내면의 상처를 제거하는데 있어서 무력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약자의 감정은 종종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는 소모적인 시도로 연결됩니다. 피해자들은 종종 모든 일에 있어서 선량한 입장에 있어야만 한다고 느낍니다. 예를 들면, 필자가 아는 한 여성은 과거의 성학대와 싸우고 있는데 그녀의 아들이 진흙탕에서 놀았다는 이유로 아들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다른 여섯 살 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아이는 흙 속에서 뒹구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집으로 들여보낸 뒤 필자에게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녀는 아이에게 고함지른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는 종종 아이에게 화를 낸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나무람이 필자에 대한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심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필자에게 사과를 할 필요를 느꼈는지를 그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저는 항상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일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느껴요. 저는 어떤 것이 나쁜 상태에 있으면 내 자신이 싫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쉴 수 없는 누군가와의 내면의 전쟁을 표현하였습니다. 때로는 완벽하고 싶고 실패하기 싫고,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지속적인 압박감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기대에 대한 부응에 실패하는 것은 오히려 지치게 만들고 자신에 대한 증오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무력감은 종종 절망감으로 발전합니다. 무능력하게 되는 끔찍한 경험은 종종 "신경쓰기 싫어"라고 하는 의기소침한 태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많은 성학대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비난 받아야 한다 여기고 주기적인 우울증의 발작과 만성적인 자기경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왜 내가 학대를 막을 수 없었을까?"라는 의문이 지겨운 상처와 같이 지속되기만 합니다. 한 여성은 " 내가 좀더 영리하고, 강하고, 용감했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했습니다. 이보다 심한 거짓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 사건에 대해 피해자가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해도 궁국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않습니다. 무력감은 보통 내면에 자리잡고 자기증오심은 절망의 수준까지 깊어집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무력감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절망감과 우울함이 그 뒤를 바싹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배신의 느낌

성학대는 신뢰에 대한 비극적인 배반입니다. 신뢰는 성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을 배우기 전까지 하나님의 대역으로 부모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아이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양육하고 훈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에베소서 6:4). 성학대로 인한 배반감 만큼 화를 자극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신뢰를 침해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가슴 아픈 상처를 받지 않고 삶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적절하고 안전한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안전함은 아이가 공포나 비난 없이 현실의 다른 조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접착제입니다. 신뢰가 비극적으로 깨졌을 때, 결국 아이들은 배움과 성장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보호자들에게 의심을 품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89%), 가해자는 피해자의 친척이거나 아는 사람입니다. 전형적인 성학대자는 보통 실제적인 성학대 이전에 얼마 기간 동안 아이를 "준비"시킵니다. 아이와 친밀의 고리를 형성하기 위해 특별한 호의를 베풀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접촉 및 아이와의 유대감을 높이는 즐거운 관계에 의해 깊어집니다. 신체적인 접촉이 적절함과 성적이지 않은 사이의 선에서부터 부적절함과 성적인 사이의 선으로 넘어갈 때까지 그것이 종종 자연스럽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전이라고 여겨지며, 피해자도 이러한 진전을 바라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의하여 계획되고 이용당하는 배신은 심각합니다. 가해자는 하나님이 주신 친밀감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망을 영혼을 파괴시키는 관계를 위해 미끼로 사용합니다. 피해자는 그 준비를 볼 수도 없고 멈추게 할 수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유혹의 과정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피해자가 학대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 다른 배신의 유형은 "비가학적"부모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성학대에 관해 알거나 또는 알아야 하는 부모가, 이유야 어쨌든 간에, 그 증거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입니다. 한 여자는 16살 된 남자 조카와 10살 된 딸이 함께 침대 이불 속에 누워있는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몇 주가 지나서야 딸에게 호되게 말했습니다. "네 사촌 오빠랑 이상한 짓 한건 아니겠지! 다음에 또 그러면 가만히 안둘테다." 엄마가 딸을 보호하고 위로하고 양육하지 못한 것은 성학대의 사건 만큼이나 심각한 배신이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성학대에 대해 모를 수도 있지만, 부모들은 아이의 성격, 변덕, 우울증, 반항적 행동, 고도한 성적관심, 반복되는 자위행위 등에서 변화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의 신호를 찾지 못할 정도로 충분히 보살피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를 보호하는 일에 실패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배신은 적어도 두 가지 방법으로 피해자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친밀감의 욕구에 대해 증오심으로 발전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이에게 의심을 품게 됩니다.

어린 시절 그의 목사에 의해 성학대를 받은 한 남자가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사랑에 대한 갈망이 없었더라면, 나는 결코 그처럼 나약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자신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갈망했던 것만큼 범죄자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성학대 피해자들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그들의 갈망을 이기적이거나 또는 나약한 것으로 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부드러움과 연민에 대한 정당한 갈망을 억누르고 대신, 더 기계적이고 감성과 동떨어진 관계를 추구하게 됩니다. 많은 성학대 피해자들은 사실상 하나님이 주신 욕망이 무시되거나 수치심을 받는 관계 속에서 더 편안함을 느낍니다.

배신의 두 번째 영향으로, 성학대 피해자들은 다른 사람을 믿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피해자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을 어느 정도의 의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알기 어렵지만 피해자들은 대부분 무관심한 사람이나 착취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들보다 오히려 친절하고 점잖고 애정 어린 사람에게 더 많은 의심을 품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성학대 피해 여성들의 비극은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이 신뢰할만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는 심해지고 진실한 사랑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는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냉담하고 매혹적인 남성에게 마음이 끌린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친절하고 정중한 그 남자와 데이트를 하였으며 그가 지루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지루하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신뢰할만 하다는 의미였고 그녀가 흥미를 가지고 본 점은 사랑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진실된 욕망을 이끌어 내려는 사람처럼 결코 당신의 마음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친구는 성학대자 보다 더 위험하게 느껴질 것이고 따라서 더 많은 의심의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명백히 성학대 피해자는 진실과 의혹의 문제로 인해 매일같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란의 느낌

무력감과 배신감으로부터 오는 상처는 끔찍합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능력에 대한 의심과 사랑하고자 하는 갈망에 대한 경멸감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신뢰에 대한 혼란을 만들어냅니다. 안타갑게도 여기에는 혼란 이상의 상처가 존재합니다. 성학대는 더 큰 내면의 상처를 남깁니다. 혼란함의 격분을 일으키고 한 사람의 성 정체성에 대해 수치심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상처에 대한 이유는 복잡합니다. 성적인 접촉 또는 성관계가 약탈적이고 잘못된 정황 속에서 일어났다 할지라도 육체와 마음으로부터 흥분과 만족을 이끌어 내었다는 사실이 뿌리가 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학적인 성관계가 피해자에게 성적인 만족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격렬한 혼란감을 일으킵니다. 한편으로는 성적흥분이 좋았고 그것이 유일하게 느낀 친밀감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용 당한다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용 당한다는 증오심은 만족감, 추구의 기쁨, 사랑 받고 싶은 갈망과는 조화하지 못합니다.

모순된 감정에 대한 격한 마음은 아이나 청소년이 견뎌낼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러한 감정들을 어른들이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학대한 사람에의해 착취당한 성적 만족으로부터 친밀감에 대한 자연스러운 갈망을 분리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아이도 성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유일하게 주어진 관계가 가학적이라면 그들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물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에게 친밀함에 대한 배고픔과 갈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의 갈망이 사랑과 적합한 관계 속에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적은 친밀함에 대한 갈증을 선과 악의 주요 전쟁터로서 목표를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적인 감정, 생각, 행위가 결혼이라는 결속된 관계 속에서 즐거운 것이 되고 친밀감을 쌓아가는 것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의 잠재성을 알고 성학대를 그것을 파괴하는 주된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성학대는 피해자의 마음에 성, 친밀감, 그리고 수치심 간의 비극적이고 그릇된 연결고리를 만듭니다. 성학대를 받은 많은 남성과 여성에게 성적인 만족은 사랑과 동등합니다. 아이들은 성학대범이 행한 동일한 방법으로 성기를 자극하는 것이 자신의 고통이나 스트레스를 풀어줄 수 있다고 학습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피해자들은 문란한 생활 속에서 그들의 성욕에 대한 증오심으로 살아갈지 모르며 또는, 과거의 기쁨, 배신감, 그리고 무력감을 저지하는 방법으로서 성을 경멸하는 법을 배울지도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성학대 피해자들은 그들의 성 정체성에 대해 씨름하게 됩니다.

모순된 감정은 끔찍한 수치심과 위험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상당 부분의 수치심은 다음과 같은 의문에서부터 일어납니다. "내가 학대 받는 동안 어떠한, 심지어 아주 극미한 정도일지라도, 만족을 느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이 사실이 알려지면 더 많은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실상, 많은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에게 정말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이게 전부 내 잘못은 아니야. 너는 불평하지도 않았고 나를 멈추게 하지도 않았어. 너는 내가 너에게 한 행동을 좋아했어."

이러한 말로 인해 많은 피해자들이 친밀감의 옳은 감정과 그른 감정 사이의 차이를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한 예로, 어떤 교회의 급식소의 간사로 섬기고 있는 한 여성이 회중들 앞에서 목사로부터 그녀에 사역에 대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목사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가 얼마나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는지를 따스하게 말했습니다. 그에 대한 그녀의 대응은 경직되고 공손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그녀는 불결함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성적인 생각들과 감정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러한 감정들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녀가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한 것은 자위행위였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자기경멸감, 죄의식, 혼란감으로 인해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녀 내면의 폭풍에 대한 치료방법은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미친 듯이 집안 청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친절한 남자와 있을 때 그녀 스스로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그녀의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성적인 감정이 느껴지면, 가능한 멀리, 그리고 빨리 도망가서 그녀의 굳은 공손함 뒤로 숨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과 다른 이들에 대한 열정을 식혀버리는 생명력 없고 공허한 보호처에 남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느낌

성학대의 결과 중에 가장 비극적인 것은, 많은 피해자들이 아무도 그들 내면의 싸움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피해자들이 그들의 과거로 인해 그들이 사랑하거나 사랑 받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속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성적 감정에 대한 내면의 상처, 분노, 그리고 혼란은 많은 피해자들이 그들의 하늘 아버지가 역겹고 증오스럽거나 또는 완전히 상관없다라고 느끼게 만듭니다. 그 결과, 형식적인 연기로 그들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거나 또는 하나님이 이미 자신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생각하고 하나님에게서 돌아서버립니다.

달리 말하자면, 성학대로 인해 피해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들의 사랑을 받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희망은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이 상처를 치료할 능력이 있으십니다.

- 댄 B. 앨렌더
댄 앨렌더(Dan Allender)는 워싱턴 시애틀의 웨스턴 신학교에서 상담 교수로 재직중이며 Wounded Heart Ministries의 대표입니다.

회복을 위한 심리치료가 필요하시다면
전문적으로 성과 동성애 문제를 다루는 "성중독심리연구소" 에 문의 하시기 바랍니다.
TEL: 070-8659-2479 www.sri.or.kr


참조: 웰스프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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