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근 같았던 성중독에서 빠져나와 인생의 축제를 맞이하며
작성자: renwed
작성일: 2015-05-05 16:28
조회: 571
기근 같았던 성중독에서 빠져나와 인생의 축제를 맞이하며
저는 성 중독이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성 중독은 마음이 연약해 진 상태에서 습관적인 성적 죄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제게 이런 말을 할 권위가 있다면 이는 예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분은 저의 힘이십니다. 예수를 떠난다면 제게는 성적인 죄를 거부할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홀로 남겨졌다면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의 육신을 탐닉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성 행위가 삶의 양식처럼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찍부터 우리는 진정한 삶의 모습을 흉내 낸 거짓 이미지와 거짓 생각들을 먹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가장 큰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우리의 상상력 안에 가득 채우라.”는 거짓말에 속아 왔습니다. 우상화된 남성이나 여성의 생생한 이미지들에 둘러 쌓여 있을 때, 우리의 외로움도 잠시 동안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타락하기 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자위행위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으로 추락하고 나면, 우상화된 사랑과 삶의 원천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거짓 연인은 우리 자신 안의 어두움을 드러냅니다. 충혈되고 허기진 듯한 그들의 눈빛에 반사된 것은 우리 자신의 외로움이며, 연합하려던 또 하나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 그 외로움은 더욱 깊어집니다.
우리는 추구하는 바가 허황된 것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멈추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어두움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타락하고 사악한 마음이(즉 우리의 육신이 혹은 옛 사람이) 즐거움을 간직해 왔던 주도권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로는 더 이상 그 죄를 짓지 않을 선택의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저는 성적인 공상과 자위행위라는 어두움의 길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던 저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추구했던 것의 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쾌락을 선택했고 결국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이 죄악된 성향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저를 억눌렀습니다. 강렬한 성적 유혹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는 이 같은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죄의 유혹에 빠져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는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그래서 그분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아버지, 왜 이렇게 강렬한 것입니까?”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아버지께서는 일련의 기억들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이 기억들은 유아기 말에 시작되어 십대에 이를 때까지 제 안에 부정한 성적인 환상들이 얼마나 강렬하고 꾸준히 계속되어 왔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육욕적인 그림이나 책들 그리고 마침내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홀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무도 저의 이런 “진정한 삶”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의 이미지를 통해 혹은 실제로 상대를 만나 부정한 화합을 이룰 때 마다 혹은 제 기억 속에 저장된 기억들이 나타날 때 마다 제 마음 세계의 상처는 갈수록 심해졌고 깊어졌습니다.
사탄은 이렇듯 은밀한 세계에 살며 부정한 이미지들과 자신에게 저항하지 못하도록 속인 마음의 끈을 더욱 팽팽하게 조입니다. 사탄은 더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들여 남성과 여성을 우상화하며, 우리를 이 우상에게 예배하도록 만듭니다. 이때 우리는 예배와 매우 동일한 모습의 행위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 도착이라는 주인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성과의 사랑의 언약과는 전혀 동떨어진 모습을 한 사람으로 변해 갈 때, 우리의 주인은 성적인 부도덕함을 통해 삶과 사랑과 창의성을 흉내내려 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우리의 성품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이에 따라 영적인 압박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진실한 사람들과의 진정한 교제에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려 합니다. 이 곳에서 제가 말하는 바는 성적이지 않은 친밀감입니다. 동성애적인 죄와 오랜 시간 씨름 해 온 사람이라면 대부분 관계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혹하는 일 없이도 그리고 양 쪽이 모두 옷을 갖추어 입고서도 진정한 자존감과 능력을 선사해 주는 관계의 존재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일찍이 중독자들은 성과 친밀감을 동일시 했습니다. 자신의 외로움을 생각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과 자존감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중독자는 성 행위의 능력을 점차 깨닫게 됩니다. 정당한 필요는 오르가즘의 소용돌이와 다른 사람에게 소유 당하고 싶은 육욕의 유혹에 억눌립니다.
중독자는 부정한 성행위를 통해 일종의 통제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약하고 상처받은 존재라는 사실이 남에게 알려질 때 느낄 고통과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육신을 가릴 껍질을 발견합니다. 이 껍질은 자신의 마음과는 완전히 분리 되어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서 있는 육체의 이미지 입니다. 그는 원할 때는 언제나 이 껍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감수해야 할 위험이나 실망스러움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사역하던 단체에서 만난 한 남성은 육체에만 집착하고 자신의 마음을 숨기려는 중독자들의 성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여자를 알았던 적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오직 성 행위를 하기 위해 여자를 만나왔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중 한 명도 진짜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나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젊은 청년을 거짓 자존감과 성 행위가 느끼게 해주었던 거짓 능력의 느낌에서 해방시키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오직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실 수 있는 애정을 가지고 그의 마음을 고치시며 회복시키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만이 거짓 사랑의 영향을 묶을 수 있고 진정한 사랑의 능력이 우리 안에 놓여날 수 있습니다. 자유를 향해 가는 이 여정에는 몇 가지 이정표가 있습니다.
성 중독에서 자유로 가는 단계
첫째, 우리는 성적으로 타락한 우리의 모습 그대로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너무나 심하게 병들게 했으며, 우리 자신에게는 이를 치유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성적인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죄인 자신이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이 그의 마음을 충분히 감찰 하셔야 합니다. 죄가 가져온 파괴력을 죄인 자신이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상담했던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말 할 줄은 알았지만 진심으로 뉘우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죄를 향한 의지와 욕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기초적인 치유 단계에 있는 경우에는 심지어 죄와 재결합하려 하며 이를 즐기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어둠을 뚫고 들어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우리 자신 앞에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때로 빛 대신 어둠을, 왕의 의복 대신 누더기를, 진실 대신 거짓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의 이러한 이중적인 마음을 고백할 때 온전한 마음으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빛의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빛이 비취이게 되면 죄의 진정한 본성이 드러날 것이고 우리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치유와 구원을 부르짖을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우리와 함께 서서 우리 자신의 죄가 드러날 수 있도록 돕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가 있다는 더 큰 사실이 드러날 수 있도록 도울 하나님의 형상을 한 남성과 여성들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이 거짓으로 우리의 즐거움을 삼으며 지내던 은신처에서, 성벽이 굳게 쌓인 요새에서 빠져 나오도록 우리를 강권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또한 예수님과 연결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죄와 추악한 모습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것들을 이들 앞에 내놓을 때 우리는 보다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상 숭배의 과거를 예수님 앞에 모두 고백해야 합니다. 믿을만한 중재자를 통해서 고백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상 숭배의 뿌리는 그 역사가 매우 깊으며, 십자가 앞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그제야 진정한 우리의 마음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죄의 깊이가 들어나면서 우리의 슬픔도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의 모든 어두움의 사건들을 십자가의 발 밑에 내려 놓도록 권고 하십니다. 고백의 시기가 계속되면서 우리는 슬퍼하는 한편 자유로워 집니다.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알릴 각오가 되어 있을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존재는 마치 자석처럼 부도덕이 만들어 낸 사망의 그림자를 밀어 내십니다. 어두움이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백을 통해 빛이 그보다 더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와 죄의 요새를 깨뜨립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속박했던 것들이 깨지면서 남긴 잔해를 친히 짊어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끌어 내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깨진 마음을 보듬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나는 엘리야가 예수님의 형상을 미리 보여 주었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구부리고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열왕기상 17:21).” 아이는 살아 났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우리 위에 구부리시고 우리 죄의 대가로 탄생한 사망을 친히 짊어 지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분의 희생으로 되살아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할 수 있도록 중재자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이제 우리가 용서 받았음을 선포합니다. 그저 조용히 주께서 친히 고백해야 할 죄들을 보여주시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며 온전하게 되었다는 심오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용서를 받는 사람에게 물을 뿌리는 일도 도움이 됩니다. 물은 성경에서 깨끗게 함(히브리서 10장 20절이 하나의 예입니다.)을 의미합니다. 고백 의식에서 물을 사용하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는 없지만 우리가 실제로 정결케 되었다는 느낌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용서와 정결케 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으로 자유로이 흘러 들어오며, 마음의 강한 요새가 되어 줍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은 강력한 예수님의 임재로 둘러 쌓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우리 마음 밭에 심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진심으로 열망했던 대상은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상징이자 징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가장 연약한 순간에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가장 약한 순간에 그분은 우리의 힘과 보호막이 되어 주십니다. 과거에는 어둠이 왕 노릇 하던 곳에 빛의 요새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 산성에 거하는 한 우리는 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적인 죄를 지으면 살던 비현실의 세계를 만들어 내던 힘과 원천이 무엇이었는지도 밝혀집니다. 죄의 파괴성에 민감해진 우리는 이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굳게 서서 우리 마음에 다시 들어오려는 모든 정결치 못한 영적 세력들 위에 예수님의 승리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한 분뿐임을 더욱 확고하게 믿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마음 밭을 방어하며, 그분의 거룩한 능력으로 우리를 과거의 비 현실적인 삶으로 되돌아 가도록 억압하는 영적인 세력들과 맞서 싸웁니다.
정결하게 씻기고 그분의 보호 아래 있는 우리는 이제 자유케되어 우리 마음의 진정한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삶의 많은 문제들을 직면하면서 불편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순간들을 맞이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성적이지 않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 할 때 거절당할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우리를 두렵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드러내시기도 하지만 홀로 있고 싶지 않은 우리 마음의 진실되고 선한 욕망도 드러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우리가 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벌거벗어 수치스럽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육욕의 거짓된 껍질을 여전히 따라가는 마음 한편으로, 우리의 진정한 감정들이 그분의 임재 앞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타락한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과로 생긴 고통을 억누르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무감각함으로 인한 고통과 그로 인해 소리 없이 생겨난 제 안의 고통, 그 후 그들과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생겨난 고통. 이는 즉 그 누구도 제 마음의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씁쓰름한 기억들이었습니다. 이제 저의 필요는 오히려 그분과 더욱 친밀해 질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와 함께 조용히 보내는 시간들을 좋아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거나, 시편을 묵상하거나, 혹은 성찬에 참여하는 일은 제 고통 가운데로 아버지의 은혜를 흘려 보내고, 보다 진실되게 사랑할 수 있도록 제 마음을 해방시키는 좋은 통로가 됩니다.
저는 특별히 성찬 가운데 흘러 넘치던 부드러운 능력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빵과 포도주를 먹을 때 예수님께서 제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분은 깨지고 피 흘리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내 안에 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상한 마음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자신을 드러내셨고, 저의 진정한 자아를 부활시켜 주셨습니다(요한복음 6:53-58). 저는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 때문에 나는 생명의 떡을 먹게 되었습니다. 거짓된 다른 사람의 육체는 썩은 맛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친밀함의 맛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상징하는 의식으로는 성찬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도 동일하게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 헌신할 자유를 혼자 찾을 수 있는 중독자는 없습니다. 거짓된 육신에 종 노릇 해오다 자유를 얻게 되면, 그는 이제 진정한 마음의 부르짖음을 발견하고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부르짖음은 진실된 자아를 찾기 위한 울음이며,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진정한 남성과 여성을 찾는 울음입니다. 그러면 사랑과 이해와 지원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필요들이 욕정의 굴레를 뚫고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첫번째 과제는 아마도 자신들의 정당한 필요를 성욕화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자신의 자유를 찾으려는 결심이라는 공통된 배경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보살핌을 성적인 의도가 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신체적인 접촉은 성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점차 성적인 유희의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자신이 솔직히 고백한 감정들은 사실 육체적인 느낌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비교적 온전한 사람들이 이들에게 선사한 좋은 선물도 중독자의 육욕적인 렌즈에 굴절되어 왜곡되게 이해됩니다. 그는 다시 한번 수치심에 빠지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사랑 받을 수 없는 존재인지를 상기시키는 수 많은 증거들을 보며 스스로를 질책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친교하고 싶은 당신의 애타는 마음이 이 모든 것을 압도할 것입니다.
본인에게 의지가 있다면, 그리고 자신을 도와줄 환경이 주위에 잘 조성되어 있다면 과거에 중독을 경험했던 사람들 스스로가 마음에 남겨진 상처와 수치심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며, 육욕적이지 않은 사랑의 축복을 새롭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서로에게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면 정직하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직한 공동체는 각 구성원들을 권고하여 어둡고 공상적인 생각들을 고백하고 밝은 빛 앞에 이들을 내려 놓을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사람은 이제 심지어 자신 안에 거짓된 육욕으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을 때조차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체에서 자신을 떼어 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제 신뢰가 두려움과 감춤의 자리를 대신합니다. 진실되고 서로를 돌보는 믿는 자들의 그룹 안에 속해 있다는 느낌, 즉 소속의 경험을 하게 되면 자신 안에서 부르짖던 마음의 울음소리도 안정을 찾습니다. 이 경험은 또한 로맨틱하거나 육욕적인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사람들과 교류할 줄 아는 진정한 인간으로 더욱더 발전해 나아가게 됩니다. 전 중독자들의 첫번째 과제는 육욕화 된 정당한 필요들을 원상태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성적인 중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온전한 관계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되고 실제적인 사랑 안에 푹 잠길 수 있다면 실제가 아닌 존재들은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제 아내 아네트와 저는 벌거벗어도 수치스럽지 않은 자유의 위대함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통해 신성한 성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지나치게 도취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서로 교류할 것을 서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좋은 남성 친구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특히 조나단 헌터는 제가 남성성을 북돋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쉽고 값싼 사랑의 모조물에 현혹 당하지 않고, 의로움 가운데 굳게 서서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 갈수 있도록 서로를 도왔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의 문제와 실패에 대해 신속하고 구체적으로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도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 덕분에 저는 이제 순결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거짓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거짓된 이미지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합니다. 저는 이제 진정한 자아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랑할 줄 아는 모습으로 자유롭게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연약함 중에 강함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저의 진정한 자아 가운데, 그리고 이제는 제가 자유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이들의 진정한 자아 가운데 아름다움이 되십니다. 그분을 통해 저는 그분의 피조물을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사랑이 갈급한 저를 자유케 하십니다. 이제 저는 무엇에든 참되며 무엇에든 경건하며 무엇에든 옳게 되었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서 4:8)
- 앤드류 코미스키
회복을 위한 심리치료가 필요하시다면
전문적으로 성과 동성애 문제를 다루는 "성중독심리연구소" 에 문의 하시기 바랍니다.
TEL: 070-8659-2479 www.sri.or.kr
참조: 웰스프링
저는 성 중독이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성 중독은 마음이 연약해 진 상태에서 습관적인 성적 죄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제게 이런 말을 할 권위가 있다면 이는 예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분은 저의 힘이십니다. 예수를 떠난다면 제게는 성적인 죄를 거부할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홀로 남겨졌다면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의 육신을 탐닉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성 행위가 삶의 양식처럼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찍부터 우리는 진정한 삶의 모습을 흉내 낸 거짓 이미지와 거짓 생각들을 먹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가장 큰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우리의 상상력 안에 가득 채우라.”는 거짓말에 속아 왔습니다. 우상화된 남성이나 여성의 생생한 이미지들에 둘러 쌓여 있을 때, 우리의 외로움도 잠시 동안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타락하기 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자위행위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으로 추락하고 나면, 우상화된 사랑과 삶의 원천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거짓 연인은 우리 자신 안의 어두움을 드러냅니다. 충혈되고 허기진 듯한 그들의 눈빛에 반사된 것은 우리 자신의 외로움이며, 연합하려던 또 하나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 그 외로움은 더욱 깊어집니다.
우리는 추구하는 바가 허황된 것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멈추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어두움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타락하고 사악한 마음이(즉 우리의 육신이 혹은 옛 사람이) 즐거움을 간직해 왔던 주도권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로는 더 이상 그 죄를 짓지 않을 선택의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저는 성적인 공상과 자위행위라는 어두움의 길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던 저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추구했던 것의 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쾌락을 선택했고 결국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이 죄악된 성향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저를 억눌렀습니다. 강렬한 성적 유혹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는 이 같은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죄의 유혹에 빠져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는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그래서 그분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아버지, 왜 이렇게 강렬한 것입니까?”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아버지께서는 일련의 기억들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이 기억들은 유아기 말에 시작되어 십대에 이를 때까지 제 안에 부정한 성적인 환상들이 얼마나 강렬하고 꾸준히 계속되어 왔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육욕적인 그림이나 책들 그리고 마침내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홀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무도 저의 이런 “진정한 삶”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의 이미지를 통해 혹은 실제로 상대를 만나 부정한 화합을 이룰 때 마다 혹은 제 기억 속에 저장된 기억들이 나타날 때 마다 제 마음 세계의 상처는 갈수록 심해졌고 깊어졌습니다.
사탄은 이렇듯 은밀한 세계에 살며 부정한 이미지들과 자신에게 저항하지 못하도록 속인 마음의 끈을 더욱 팽팽하게 조입니다. 사탄은 더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들여 남성과 여성을 우상화하며, 우리를 이 우상에게 예배하도록 만듭니다. 이때 우리는 예배와 매우 동일한 모습의 행위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 도착이라는 주인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성과의 사랑의 언약과는 전혀 동떨어진 모습을 한 사람으로 변해 갈 때, 우리의 주인은 성적인 부도덕함을 통해 삶과 사랑과 창의성을 흉내내려 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우리의 성품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이에 따라 영적인 압박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진실한 사람들과의 진정한 교제에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려 합니다. 이 곳에서 제가 말하는 바는 성적이지 않은 친밀감입니다. 동성애적인 죄와 오랜 시간 씨름 해 온 사람이라면 대부분 관계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혹하는 일 없이도 그리고 양 쪽이 모두 옷을 갖추어 입고서도 진정한 자존감과 능력을 선사해 주는 관계의 존재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일찍이 중독자들은 성과 친밀감을 동일시 했습니다. 자신의 외로움을 생각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과 자존감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중독자는 성 행위의 능력을 점차 깨닫게 됩니다. 정당한 필요는 오르가즘의 소용돌이와 다른 사람에게 소유 당하고 싶은 육욕의 유혹에 억눌립니다.
중독자는 부정한 성행위를 통해 일종의 통제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약하고 상처받은 존재라는 사실이 남에게 알려질 때 느낄 고통과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육신을 가릴 껍질을 발견합니다. 이 껍질은 자신의 마음과는 완전히 분리 되어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서 있는 육체의 이미지 입니다. 그는 원할 때는 언제나 이 껍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감수해야 할 위험이나 실망스러움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사역하던 단체에서 만난 한 남성은 육체에만 집착하고 자신의 마음을 숨기려는 중독자들의 성향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여자를 알았던 적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오직 성 행위를 하기 위해 여자를 만나왔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중 한 명도 진짜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나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젊은 청년을 거짓 자존감과 성 행위가 느끼게 해주었던 거짓 능력의 느낌에서 해방시키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오직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실 수 있는 애정을 가지고 그의 마음을 고치시며 회복시키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만이 거짓 사랑의 영향을 묶을 수 있고 진정한 사랑의 능력이 우리 안에 놓여날 수 있습니다. 자유를 향해 가는 이 여정에는 몇 가지 이정표가 있습니다.
성 중독에서 자유로 가는 단계
첫째, 우리는 성적으로 타락한 우리의 모습 그대로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너무나 심하게 병들게 했으며, 우리 자신에게는 이를 치유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성적인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죄인 자신이 먼저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이 그의 마음을 충분히 감찰 하셔야 합니다. 죄가 가져온 파괴력을 죄인 자신이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상담했던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말 할 줄은 알았지만 진심으로 뉘우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죄를 향한 의지와 욕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기초적인 치유 단계에 있는 경우에는 심지어 죄와 재결합하려 하며 이를 즐기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어둠을 뚫고 들어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우리 자신 앞에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때로 빛 대신 어둠을, 왕의 의복 대신 누더기를, 진실 대신 거짓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의 이러한 이중적인 마음을 고백할 때 온전한 마음으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빛의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빛이 비취이게 되면 죄의 진정한 본성이 드러날 것이고 우리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치유와 구원을 부르짖을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중재자가 필요합니다. 우리와 함께 서서 우리 자신의 죄가 드러날 수 있도록 돕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가 있다는 더 큰 사실이 드러날 수 있도록 도울 하나님의 형상을 한 남성과 여성들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이 거짓으로 우리의 즐거움을 삼으며 지내던 은신처에서, 성벽이 굳게 쌓인 요새에서 빠져 나오도록 우리를 강권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또한 예수님과 연결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죄와 추악한 모습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것들을 이들 앞에 내놓을 때 우리는 보다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상 숭배의 과거를 예수님 앞에 모두 고백해야 합니다. 믿을만한 중재자를 통해서 고백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상 숭배의 뿌리는 그 역사가 매우 깊으며, 십자가 앞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그제야 진정한 우리의 마음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죄의 깊이가 들어나면서 우리의 슬픔도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의 모든 어두움의 사건들을 십자가의 발 밑에 내려 놓도록 권고 하십니다. 고백의 시기가 계속되면서 우리는 슬퍼하는 한편 자유로워 집니다.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알릴 각오가 되어 있을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존재는 마치 자석처럼 부도덕이 만들어 낸 사망의 그림자를 밀어 내십니다. 어두움이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백을 통해 빛이 그보다 더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와 죄의 요새를 깨뜨립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속박했던 것들이 깨지면서 남긴 잔해를 친히 짊어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끌어 내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깨진 마음을 보듬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나는 엘리야가 예수님의 형상을 미리 보여 주었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구부리고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열왕기상 17:21).” 아이는 살아 났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우리 위에 구부리시고 우리 죄의 대가로 탄생한 사망을 친히 짊어 지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분의 희생으로 되살아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할 수 있도록 중재자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이제 우리가 용서 받았음을 선포합니다. 그저 조용히 주께서 친히 고백해야 할 죄들을 보여주시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며 온전하게 되었다는 심오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용서를 받는 사람에게 물을 뿌리는 일도 도움이 됩니다. 물은 성경에서 깨끗게 함(히브리서 10장 20절이 하나의 예입니다.)을 의미합니다. 고백 의식에서 물을 사용하는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는 없지만 우리가 실제로 정결케 되었다는 느낌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용서와 정결케 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으로 자유로이 흘러 들어오며, 마음의 강한 요새가 되어 줍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은 강력한 예수님의 임재로 둘러 쌓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우리 마음 밭에 심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이 진심으로 열망했던 대상은 바로 예수님이었다는 상징이자 징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가장 연약한 순간에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가장 약한 순간에 그분은 우리의 힘과 보호막이 되어 주십니다. 과거에는 어둠이 왕 노릇 하던 곳에 빛의 요새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 산성에 거하는 한 우리는 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적인 죄를 지으면 살던 비현실의 세계를 만들어 내던 힘과 원천이 무엇이었는지도 밝혀집니다. 죄의 파괴성에 민감해진 우리는 이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굳게 서서 우리 마음에 다시 들어오려는 모든 정결치 못한 영적 세력들 위에 예수님의 승리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한 분뿐임을 더욱 확고하게 믿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마음 밭을 방어하며, 그분의 거룩한 능력으로 우리를 과거의 비 현실적인 삶으로 되돌아 가도록 억압하는 영적인 세력들과 맞서 싸웁니다.
정결하게 씻기고 그분의 보호 아래 있는 우리는 이제 자유케되어 우리 마음의 진정한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삶의 많은 문제들을 직면하면서 불편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순간들을 맞이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성적이지 않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 할 때 거절당할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우리를 두렵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드러내시기도 하지만 홀로 있고 싶지 않은 우리 마음의 진실되고 선한 욕망도 드러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우리가 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벌거벗어 수치스럽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육욕의 거짓된 껍질을 여전히 따라가는 마음 한편으로, 우리의 진정한 감정들이 그분의 임재 앞에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게 타락한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과로 생긴 고통을 억누르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무감각함으로 인한 고통과 그로 인해 소리 없이 생겨난 제 안의 고통, 그 후 그들과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생겨난 고통. 이는 즉 그 누구도 제 마음의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씁쓰름한 기억들이었습니다. 이제 저의 필요는 오히려 그분과 더욱 친밀해 질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와 함께 조용히 보내는 시간들을 좋아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거나, 시편을 묵상하거나, 혹은 성찬에 참여하는 일은 제 고통 가운데로 아버지의 은혜를 흘려 보내고, 보다 진실되게 사랑할 수 있도록 제 마음을 해방시키는 좋은 통로가 됩니다.
저는 특별히 성찬 가운데 흘러 넘치던 부드러운 능력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빵과 포도주를 먹을 때 예수님께서 제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분은 깨지고 피 흘리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내 안에 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상한 마음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자신을 드러내셨고, 저의 진정한 자아를 부활시켜 주셨습니다(요한복음 6:53-58). 저는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 때문에 나는 생명의 떡을 먹게 되었습니다. 거짓된 다른 사람의 육체는 썩은 맛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친밀함의 맛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상징하는 의식으로는 성찬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도 동일하게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 헌신할 자유를 혼자 찾을 수 있는 중독자는 없습니다. 거짓된 육신에 종 노릇 해오다 자유를 얻게 되면, 그는 이제 진정한 마음의 부르짖음을 발견하고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부르짖음은 진실된 자아를 찾기 위한 울음이며,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진정한 남성과 여성을 찾는 울음입니다. 그러면 사랑과 이해와 지원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필요들이 욕정의 굴레를 뚫고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첫번째 과제는 아마도 자신들의 정당한 필요를 성욕화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자신의 자유를 찾으려는 결심이라는 공통된 배경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보살핌을 성적인 의도가 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신체적인 접촉은 성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점차 성적인 유희의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자신이 솔직히 고백한 감정들은 사실 육체적인 느낌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비교적 온전한 사람들이 이들에게 선사한 좋은 선물도 중독자의 육욕적인 렌즈에 굴절되어 왜곡되게 이해됩니다. 그는 다시 한번 수치심에 빠지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사랑 받을 수 없는 존재인지를 상기시키는 수 많은 증거들을 보며 스스로를 질책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친교하고 싶은 당신의 애타는 마음이 이 모든 것을 압도할 것입니다.
본인에게 의지가 있다면, 그리고 자신을 도와줄 환경이 주위에 잘 조성되어 있다면 과거에 중독을 경험했던 사람들 스스로가 마음에 남겨진 상처와 수치심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며, 육욕적이지 않은 사랑의 축복을 새롭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서로에게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면 정직하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직한 공동체는 각 구성원들을 권고하여 어둡고 공상적인 생각들을 고백하고 밝은 빛 앞에 이들을 내려 놓을 수 있도록 합니다. 이 사람은 이제 심지어 자신 안에 거짓된 육욕으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을 때조차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체에서 자신을 떼어 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제 신뢰가 두려움과 감춤의 자리를 대신합니다. 진실되고 서로를 돌보는 믿는 자들의 그룹 안에 속해 있다는 느낌, 즉 소속의 경험을 하게 되면 자신 안에서 부르짖던 마음의 울음소리도 안정을 찾습니다. 이 경험은 또한 로맨틱하거나 육욕적인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사람들과 교류할 줄 아는 진정한 인간으로 더욱더 발전해 나아가게 됩니다. 전 중독자들의 첫번째 과제는 육욕화 된 정당한 필요들을 원상태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성적인 중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온전한 관계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되고 실제적인 사랑 안에 푹 잠길 수 있다면 실제가 아닌 존재들은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제 아내 아네트와 저는 벌거벗어도 수치스럽지 않은 자유의 위대함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통해 신성한 성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지나치게 도취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서로 교류할 것을 서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좋은 남성 친구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특히 조나단 헌터는 제가 남성성을 북돋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쉽고 값싼 사랑의 모조물에 현혹 당하지 않고, 의로움 가운데 굳게 서서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 갈수 있도록 서로를 도왔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의 문제와 실패에 대해 신속하고 구체적으로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도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 덕분에 저는 이제 순결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거짓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거짓된 이미지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합니다. 저는 이제 진정한 자아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랑할 줄 아는 모습으로 자유롭게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연약함 중에 강함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저의 진정한 자아 가운데, 그리고 이제는 제가 자유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이들의 진정한 자아 가운데 아름다움이 되십니다. 그분을 통해 저는 그분의 피조물을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사랑이 갈급한 저를 자유케 하십니다. 이제 저는 무엇에든 참되며 무엇에든 경건하며 무엇에든 옳게 되었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서 4:8)
- 앤드류 코미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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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웰스프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