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사는 어린 아이를 치유하라

작성자: renwed 작성일: 2015-05-05 16:11 조회: 554
내 안에 사는 어린 아이를 치유하라

(이 글은 1985년에 초판 되었습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아이는 성장하여 현재 대학에 재학 중입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큰 자랑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아네트 코미스키)

여섯 달 된 아들 그레고리를 안고 있자니, 한 작은 생명이, 어떤 면에서는 저의 분신이 제 품에 안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무엇엔가 놀라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울며 깼습니다. 아이가 낮잠에서 깨어날 때 종종 겪는 일이지요. 달래주자 아이는 미소를 짓더니 이내 평안한 모습으로 제 품에 안겼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놀라운 선물을, 이 어린 생명을 잘 돌봐야 하는 청지기의 사명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잘 돌보지 못해 그레고리가 혹시 세상을 두렵고 다가가기 힘들게 생각하지 않을까? 아이가 자신의 성(性)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 정체성을 받아들일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까? 나의 양육 방법이 아이가 예수님을 사랑이 많으신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제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태어나던 첫날부터 끊임 없이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추구했던 기억 말이지요. 제 삶의 여정은 혼동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다른 남성과 성적인 관계를 통해 사랑과 정체성을 찾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라는 배경을 가진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안에 사는 어린 아이와 쉽게 교류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의 서툰 웅얼거림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진실한 노력의 표현입니다. 쉽게 상처받았기 때문에 좌절하여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었던 그 아이는 때로 매우 충동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비판적인 부모가 세워놓은 완벽함이라는 잔인한 기준 아래 살며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없었고, 차라리 자신을 포기하고 난잡한 행동 속으로 혹은 감정 의존적인 관계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사는 어린 아이를 "육에 속한 것으로", 죄 된 욕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반응으로 어린 아이에게 문을 닫아 걸고 우리의 원수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이 어린 아이를 억누르려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우리 안에 사는 어린 아이는 성장하지 못했고 아직도 그 중심에는 정당한 필요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의 필요를 건설적인 방법으로 충족시켜 주시고자 열심을 내십니다.

내 안에 사는 어린 아이란 당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 중 하나가 어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삶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가 자신에게 보인 반응을 내재화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그가 성인이 되면 자신 안에 사는 어린 아이에게 자신의 부모가 했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는 어린 아이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반응하는 부모도 존재합니다. 그 부모는 어린 시절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대하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 모습에 따라 당신이 자신 안에 사는 어린 아이를 대할 때 존중해 줄 것인지 무시할 것인지, 받아들여 줄 것인지 판단할 것인지, 엄격하게 대할 것인지 어리광을 부리도록 놔둘 것인지가 결정 됩니다.

우리 안에 사는 어린 아이와 동성애적인 감정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동성애의 뿌리는 한 개인의 매우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동성애자로 성장하는 과정 중에는 어린 시절 동성과 친밀해 지고 닮고 싶도록 만든 결핍의 원인이 존재했기 마련입니다. 동성과의 관계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느낄 때, 특별히 동성의 부모와의 관계에서 인정을 받았을 때, 아이는 자존감과 분명한 성 정체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이는 "나는 어린소년(혹은 소녀)이야. 나는 이 모습이 좋아."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성에 대한 안정감이야 말로 소년이나 소녀가 청소년기를 거쳐 정상적인 이성애의 관계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입니다. 청년기에 우리 안에 사는 아이가 성 정체성의 영역에서 혼란을 느낀다면, 동성애 관계를 통해 분명함과 확신을 얻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동성과 육욕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성인이 된 후에도 결핍을 채우지 못한 우리 안에 사는 아이가 어린 시절 적절히 충족 받지 못했던 동성으로부터의 인정과 감정적 친밀함을 추구하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자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성의 또래 집단에서 거절을 당했다거나 너무나 바라던 부모의 인정을 받는 대신 조건적이고 감정이 없는 부모의 사랑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동성간의 성행위는 동성애를 쫓도록 만드는 동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육욕적인 필요에 대응되는 감정적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입니다. 이러한 필요는 또한 정당한 것입니다. 오히려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필요를 부정하고 육욕적인 방식으로 충족시키고자 보채는 우리 안에 있는 아이입니다. 두 사람이 협력하여 상대를 통해 완전해 지고자 성행위를 할 때 그 결과는 다만 헛될 뿐 입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부모는 우리 안에 사는 아이와 그 아이의 필요를 무시하고 혹독한 비판을 가합니다. 이 부모는 동성애적인 감정과 표현은 원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동성애로 씨름한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화가 나셨고 불쾌하게 생각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안에 사는 비판적인 부모 또한 아이를 억누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 여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사는 아이를 억누르려 합니다. 우리의 동성애적인 느낌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사는 어린 아이를 죄악 되고 강박적인 희생양으로 전락시킨 후 오직 의지로 억눌러야 할 존재로 생각합니다.

동성애적인 감정은 억누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아이를 방에 가두어 둔다면 그는 곧 창문으로 기어 나와 당신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뒷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 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성애라는 감정 역시 건설적인 방법으로 그 실체를 다루지 않는다면 언제 충동적으로 폭발할지 알 수 없습니다. 감정을 부인하는 일은 나중에는 억누를 수 없게 되고 결국 타락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한 인간을 좀먹고, 그 사람은 이에 대한 반응으로 또 다른 동성애 파티를 통해 자신의 실패를 잊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듯 파괴적인 우리 안에 사는 아이와 그의 숙적 즉 비판적인 부모의 행위를 치유하기 위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11절에서 이러한 필요를 묘사하면서 성숙한 사람으로 장성하기 위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심으로 동성애적인 감정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동성애적인 감정을 인정해야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이의 울부짖음을 못 들은 채 한다면, 이는 오히려 그의 목소리만 키우는 꼴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치유를 향한 첫 단계는 우리 안에 사는 아이의 목소리를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를 인식하는 일입니다. 비록 그 목소리가 파괴적이고 죄악 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강하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아이를 받아들이려면 먼저 비판적인 부모가 보다 친절한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 안에 우리를 받아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완벽해 지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정죄하려 드는 우리의 불완전한 시스템을 무너뜨리시고, 그분의 인내와 전능하시고 사랑이 가득하신 보살핌을 보여 주십니다. 시편 139편에는 자녀가 어두움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경우에도 모든 자녀들을 친밀하게 돌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각 구절 구절 마다 자녀들에게 끊임 없이 그 얼굴 빛을 비춰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아낌없는 하나님의 호의는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경우에도 혹은 동성애를 통해 완전해지려는 왜곡된 시도를 하는 경우에도 계속됩니다. 그분의 깊은 지식은 또한 우리의 고통과 우리가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까닭과 때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모두 이해하십니다. 이제서야 저는 저를 향한 하나님의 민망히 여기심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롭고 은혜롭게 돌보아 주셨기에 저는 이제 내 안의 어린 아이를 인정하고 지혜롭게 그리고 은혜롭게 하나님의 필요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필요와 충동적인 경향에 대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향에 한계를 긋는 것입니다. 만약 스스로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를 원한다면, 동성애적인 행동이나 저항 할 수 없을 정도로 유혹을 느낄 만한 상황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즉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의 동성애적인 감정은 네 안에 결핍이 있음을 가리키는 거야. 그러나 이러한 필요는 성적인 공상이나 성적인 행동으로는 충족되지 못해." 이러한 말을 하고 이 사실을 고수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현실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계속해서 동성애적 행동을 통해 그 어린 아이를 달래려 한다면, 당신 안의 어린 아이는 계속해서 학대 당하고 더 큰 결핍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인내를 가지고 단호하게 한계를 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필요가 드러나고 그 필요가 충족될 수 있는 치유의 장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필요란 무엇이며 그 필요를 충족시킬 방법은 있을까요? 우리 안에 사는 어린 아이의 진정한 필요는 성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것입니다. 이 필요는 또한 매우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사는 어린 아이에게는 사랑이며 하늘 아버지이며 자신을 친밀하게 돌봐 주기로 약속한 분과의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보살핌을 받고 자신의 결핍을 탈피해 성숙해 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필수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 자신이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예를 들어 구역 모임이나 성경 공부 모임) 안에 건강한 동성 간의 관계를 맺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한다면, 그토록 원했던 동성간의 친밀함과 동성과 자신의 성향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건설적인 감정의 배출구를 찾는 과정에서 당신은 다른 성인들과 동등한 성인으로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성장할 것입니다. 특별히 여성들은 다른 여성에게 집착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다른 여성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적절하지 않은 방식으로 상대에게 의존하도록 합니다. 치유를 통해 그리고 하나님 안에의 성장을 모든 관계의 중심에 놓는 방법을 배우면서 다른 피조물을 조물주의 자리에 올려 놓지 않고도 우리 안에 사는 어린 아이를 감정적으로 달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아이를 지혜롭고 은혜로운 방식으로 돌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스스로를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며, 하늘 아버지와 그분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을 자유도 얻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리고 특별히 "비판적인 부모"가 가한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의 접근을 막고 있는 깊은 결핍된 영역을 가진 사람들에게 동일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필요를 인정하고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 역시 당신의 이러한 면들을 받아들여 주실 것이고 당신 안에 있는 어린 아이의 필요를 올바르게 충족시킬 방도를 찾아 주실 것입니다. 그런 후에는 당신 안에 있는 어린 아이가 더 이상 성적인 욕망을 따르지 못하도록 기준을 정하는 일이 곧 이 아이의 영적이고 감정적인 필요를 채워 줄 길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러한 필요들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아이는 점차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성인으로 성숙해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일 은총을 허락하시고 당신의 가장 깊은 필요가 존재하는 부분에 지혜를 허락하시기를 바랍니다.

- 앤드류 코미스키

회복을 위한 심리치료가 필요하시다면
전문적으로 성과 동성애 문제를 다루는 "성중독심리연구소" 에 문의 하시기 바랍니다.
TEL: 070-8659-2479 www.sri.or.kr

참조: 웰스프링 & Desert St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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